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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13 탕자시대 -아버지- (눅 15:18-21)
작성일 :  2021-07-06 14:07
이름 :  admin E-M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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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주일마다 한 고독한 젊은이 한 사람을 만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를 탕자라고 이름 불렀습니다. 그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은 자입니다. 결과 그는 죽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고 여기서 그는 한 줄기 소망의 빛을 발견합니다. 그는 자기의 과거 앞에 허무의 절망을 합니다. 그는 자기의 현재 앞에 죽음의 위기를 절감합니다. 그는 새로운 미래를 향하여 과감한 결단을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 탕자시대의 소망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죄인이라고 하는 이 외침이야말로 비절참절의 심연에서 터져 나오는 소망이요 활로입니다. 이제 우리 함께 탕자시대의 두 번째 소망을 만나 보기로 합니다.

. 탕자시대의 소망은 아버지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아버지의 소생으로 밝혔습니다(17:29). 인류는 한 아버지를 가졌다고 했습니다(2:10). 성경은 여러 곳에 하나님 아버지를 이렇게 언급합니다. 영광의 아버지」 「모든 영의 아버지」 「온전하신 아버지. 신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경험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온갖 것들 중에 가장 위대한 경험입니다. 본문의 경험에서 아버지는 1. 모든 것의 소유주인 아버지입니다(12). 그는 세상의 온갖 존재의 근원이십니다. 그리고 그 통치자요 보호자요 관리자이십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그는 우리 육신의 온갖 재산입니다. 아무리 탕자가 허랑하고 방탕해 버려도 아버지 재산 그 자체는 탕자의 소모에 아무런 제한을 받지 아니합니다. 그는 인생의 모든 자본이십니다. 2. 사랑의 아버지입니다. 그 사랑은 잊지 않는 사랑입니다.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라고 했습니다. 탕자 편에서 아버지를 본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먼저 아들을 보았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간에는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상거가 멀었습니다. 더구나 탕자는 너무도 초라하고 불결하여 본래 아들의 모습을 찾을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을 먼저 알아보았습니다. 여러분! 여인이 어찌 그 태에서 난 자식을 잊겠습니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혈연관계의 신비로운 사랑작용입니다. 나를 조성하신 하나님, 나를 구속해 내시고 자녀 삼아주신 그 하나님이 어찌 우리를 잊어버린단 말입니까?(49:14-16)(43:1-3) 탕자는 소돔과 고모라의 여러 도시 골목들에서 허랑방탕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는 아버지의 눈이 볼 수 없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눈에 나타나지 않는 세계는 없습니다.(139:1-16). 하늘과 땅, 땅 아래 그 어디에나 아버지가 자식 있는 곳을 모르실리 없습니다. 하물며 자기 앞으로, 아버지 집 앞으로 돌아오는 아들이겠습니까? 움직이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저를 보고 달려가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아버지가 탕자를 고대한 정도가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들을 보는 사랑은 정적인 사랑입니다. 달려가는 사랑은 움직이는 사랑입니다. 사랑이 행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탕자를 향할 때 달려 왔습니다. 하나님은 범죄하여 숨어 있는 아담을 찾아오셨습니다. 여러 시대 여러 모양으로 말씀을 통하여 인생을 찾아오셨습니다(1:1-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을 통하여 달려 왔습니다(2:8-9). 여러분! 사랑은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참사랑은 움직입니다. 달려갑니다. 만나고 싶고 말하고 싶고 주고 싶어서 달려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73:28)고 했던 것입니다. 또한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3:7)고 했습니다. 진정 오늘 탕자시대는 이 움직이는 하나님의 뜨거운 동적 사랑에서만 살 길이 있습니다. 자비의 사랑을 가진 아버지입니다. 「…측은히 여겨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살 깊은 애정을 나타냅니다.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사랑은 갑자기 새로운 결심에서 일어난 사랑이 아님을 뜻합니다. 이 자비의 마음은 아들이 아버지 안에 있을 때나 떠나 있을 때나 가리지 않고 불붙고 있었던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말합니다. 진실로 부친의 눈에는 자식이 범한 죄를 보는 것 보다는 그 자식이 죄악으로 인하여 받은 상처가 먼저 보여진 것입니다. 사랑은 약한 것을 볼 때 오히려 견디지 못합니다. 죄로 인한 영육의 상처 앞에 기진맥진하여 돌아오는 아들을 아버지는 측은히 여겼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습니다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한 이것입니다(요일4:10,19). 사랑의 최절정을 나타내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목을 안고…」했습니다. 이것은 탕자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과 기쁨의 최절정을 표현하는 장면입니다. 최절정을 나타내는 사랑에는 땀과 눈물과 피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부르짖음은 심한 통곡과 눈물과 땀과 피로 올린 간구였습니다(5:7,22:4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탕자시대의 소망! 그것은 진정 아버지뿐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탕자를 향하여 계속될 동안 우리는 우리 죄로 인한 온갖 비극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탕자의 절망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은 아들을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상거가 먼데 처참한 모습이 되어 있는 나를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지구에까지 움직여 왔습니다. 그 탕자 도시의 현장까지 와서 나를 불쌍히 여겨 주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껴안고 나의 얼굴에 입 맞추고 울어 주었습니다. 정말 놀라운 사랑의 파라독스(paradox)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죄인을 사랑한 이것이야말로 역설적인 사랑입니다(5:5-8). 절대적인 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관용입니다. 절대적인 나의 배은에 대한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절대적인 나의 절망에 대한 절대적인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탕자시대의 탕자도시에 살고 있는 자녀들의 절대적 소망은 하나님 아버지 한 분만이십니다. 우리의 거룩한 소망이 아버지께 있음을 감사합시다. 그 아버지의 말씀이 우리의 심령에 거할 동안 우리의 마음은 아버지를 다시 찾는 거룩한 성소가 될 것입니다. 탕자시대의 온갖 사망의 소굴에서 떠나 아버지를 다시 모시는 거룩한 성소로써 부패한 생이 다시 소생하는 환희로 가득 차도록 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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